대공황의 늪에서 우리를 끌어올린 것은 대다수의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루스벨트 정부의 공공근로 프로그램도 아니고,적자지출도,심지어 2차 세계대전도 아니었습니다..우리를 대공황에서 벗어나게 해준 것은 유럽에서 밀려온 거대한 금의 홍수였습니다..미국이 금값을 온스당 35달러로 거의 70퍼센트 가까이 인상했을때,미국의 상품 및 서비스 가격도 함께 곧장 70퍼센트 뛰어오른 것은 아니었습니다.생각해보면 루스벨트 정부는 달러를 거의 40퍼센트가량 평가절하 했고 미국 달러의 해외구매력 역시 같은 비율만큼 하락했으며 이에 따라 수입도 깜짝 놀랄 만큼 감소했습니다.반면 해외 국가들은 그들의 화폐를 사용하면 미국의 상품을 기존에 비해 70퍼센트나 더 많이 구입할 수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통화가치를 금에 고정시키게 되면 이를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또는 요구되는 만큼의 금을 매입하거나 매도해야 합니다.따라서 별안간 세계 각국의 금광 회사들은 그들이 보유한 금을 단 한명의 고객,즉 미국 정부에 판매하게 되었습니다.여기에 교역량의 급증이 보태지면서 1934년부터 1937년까지 미국으로 흘러들어오는 금의 유입량은 극적으로 증가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1938년에 새로운 정황이 추가되었습니다.독일의 아돌프 히틀러가 오스트리아를 합병하자 전운을 감지한 유럽 각국은 겁에 질렸습니다.유럽이 전쟁의 피해를 고스란히 떠안게 되면서 유럽의 투자가들은 미국으로 눈을 돌렸고 그 결과 부의 이전이 발생했습니다.게다가 유럽의 소비재 공장들이 총기와 탄약,비행기와 탱크를 생산하기 시작하자 유럽의 대부분은 일상용품을 미국으로부터의 수입에 의존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실질적으로 미국을 대불황의 늪에서 구해 낸 것은 사회정책이 아니라 금과 해외투자자,전시 이득이었습니다.


이 시점에서 미국은 전 세계 금 보유고의 약 3분의 2를 가지고 있었고,경제력 또한 눈부신 발전을 거듭하고 있었습니다.미국은 세계 석탄 생산량의 절반 이상과 3분의 2 이상의 전기를 생산하고 있었습니다.

구조적으로 2차 세계대전의 영향을 거의 받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유럽 국가들이 서로의 공장을 파괴할 수 있도록 대량의 군사물자를 수출해 제조업을 발전시키고 있었으며,거기에 대해 금으로 대금을 받았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세계 각국의 지도자들은 그들이 경제적으로 얼마나 위태로운 상황에 처해 있는지 깨달았습니다.

이처럼 극심한 무역불균형은 종전 후 세계 통화제도를 휘청거리게 만들 수 있었습니다.

2차 세계대전이 종결되지 약 1년 전인 1944년 7월,44개국의 대표들이 국제 무역 및 금융 제도를 순조롭게 부활시킬 방안을 논의하기 위해 뉴햄프셔 브레튼우즈에 모였습니다.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대공황 시절 국제무역을 휘청거리게 했던 급작스러운 환율변동이나 통화가치 하락에 대한 걱정 없이 안심하고 교역할 수 있는 국제 통화체제 였습니다.


회의 결과 모든 통화를 미국 달러에 고정시키고,미국은 달러를 오직 타국의 중앙은행에게만 1온스당 35달러의 가격으로 태환해 준다는 결정이 내려졌습니다.이는 2ㅏ 세계대전 이후로 모든 외국의 중앙은행이 금 대신에, 또는 금과 더불어 미국 달러를 보유해야 함을 의미했습니다.

그러나 브레튼우즈 체제는 두 가지 허점을 지니고 있었습니다.그것도 솔직히 말하자면 대단히 커다란 구멍이었습니다.

먼저 그들은 금 단위당 얼마나 많은 달러를 발행할 수 있는지 그 비율을 정확히 규정하지 않았습니다.미국이 적자재정과 무역적자를 메우기 위해 아무리 많은 달러를 찍어 내더라도 이를 규제할 방도가 없었던 것입니다.

둘째,비록 미국 국민들은 금을 사적으로 보유할 수 없었지만 세계에는 아직도 금시장이 존재하고 있었으며, 브레튼우즈의 금시장과 나란히 운영되고 있었습니다.